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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이야기]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 120년된 '오류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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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이야기]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 120년된 '오류동역'
  • 김경숙 기자
  • 승인 2019.10.08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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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3탄]오류동역

이달부터 <우리동네 이야기>를 월 1회씩 연재합니다. 

2006년과 2015년에 이어 구로타임즈가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과 골목 속에 켜켜히 묻혀있는 구로지역의 역사와 전통, 자원, 삶의 이야기 등을 찾아 기록하는 일을 시작 합니다.

그 첫 번째를 오류동역(梧柳洞驛)에서 시작합니다.

 오류동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 중 하나입니다. 올해는 '모갈' 증기기관차가 첫 기적소리를 내며 오류동역 선로를 달린지 120년이 되는 해. 검은 석탄가루 날리는 화물차역이었고, 출퇴근 시간이면 압사직전의 만원이던 1호선 역, 행복주택이 들어서면서 120년만에 공원과 쉼터로 변모 된 오류동역의 어제와 지역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봅니다. - 편집자 주

120년 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이 구로구 안에 있다. 바로 오류동역(梧柳洞驛)이다.

오류동에 소재한 오류동역은 수도권 1호선으로, 개봉역과 온수역 사이에 위치해있는 경인선 철도 역.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하던 1899년 9월 18일, 인천역등 6개역과 보통역으로 문을 열고 운영되고 있다.

1899년 9월18일은 경인선 첫 개통일이었지만, 전 구간중 인천역에서부터 노량진 가정거장 사이 30.4km구간이 1차로 우선 개통한 것이다. 미국에서 들여와 인천공장에서 조립한 모갈 증기기관차는 이날 기적소리를 울리며 인천역을 시작으로 유현역(현재 동인천역)-우각현역(1905년 폐쇄)- 부평역- 소사역(현재 부천역)-오류동역, 그리고 노량진 가정거장까지 7개 역을 왕복했다.

최고속도 60km 평균 20km로, 편도 1시간 40분 소요됐다. 서울과 인천까지 걸어서 12시간 걸리던 시절,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철도시대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당초 서울에서 인천을 잇는 경인선 구간이 개통할 역은 7개역이 아니었다.

서울역까지 10개역(41km)으로 개통예정이었던 것. 그러나 한강철교 공사가 늦어져 서울역까지 전 구간을 개통할수 없었다.

결국 철도부설이 우선 완료 된 인천역부터 영등포리까지 1차적으로 개통하기로 하고, 영등포리에 노량진 가설정거장을 설치해 개통한 것이다. 경인철도회사는 이날 인천역에서 '경인철도 개업예식'이란 이름을 걸고 이같은 첫 개통식을 거행한다.

 

 

 

이후 한강철교가 완료되면서 첫 개통식 1년뒤인 1900년 7월 용산역 남대문역 서울역 구간이 개통된다. 영등포리에 설치운영해 온 노량진 가정거장은 폐쇄하고 이때 현재의 노량진역에서 개통한다.

이어 당초 계획에 없던 영등포역까지 9월에 개통한후, 1900년 11월 서울역에서 경인선 개통식이 진행된다. 경인선 전 구간 11개 역중 오류동역은 정확히 6번째역으로 중간에 위치했다.

서울역보다 1년쯤 먼저 개통한 오류동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일뿐 아니라, 현재 서울에 있는 역 가운데 당초 경인선 계획에 따라 실질적으로 해당 지역에 개통해 120년을 이어 온 가장 오래된 유일한 역이라고도 볼수 있다.

 

 

오류동역 이전뒤 오류골주막거리 쇠락’

현재 오류동역은 경인로 20길 13 (오류1-2동, 오류시장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120년 전 개통했을 때는 이 자리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번성했던 오류골 주막거리 인근(현재 동부제강부지 일원)에 위치해있다 1909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는 것.

<디지털구로문화대전_인천과 서울의 쉼터 오류동 주막거리객사편>에서 김정진 집필자는 철도개통 당시 오류동역 위치에 대해 "경인철도가 개통하면서 7개 역중 소사역은 부천역으로 발전하고, 오류골 주막거리앞에 있던 오류역은 1909년 현재의 오류동역이 있는 버들이마을로 이전했다"며 오류골 주막거리앞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오류골 주막거리 앞'이란 오류동 수궁동등 구로(갑)의 마을역사를 정리한 <향토수탄지>를 보면 오류동 87번지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현재 오류1동에서 동부제강방향으로 내려오다 경인로변 우측 온수동방향 (동부제강건물 맞은 편)쯤 되는 곳이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서 약 100리길. 걸어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이다. 이 길의 딱 중간이 되는 지점이 바로 오류골 주막거리(오류동 120번지 일원, 동부제강 일대)였다.

이로인해 오류골주막거리는 한양이나 인천으로 들어가려는 여행객이나 관군, 인천 개항후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점심을 먹고 숙박하는 이들로 번성했다.

그러나 경인철도가 등장하면서 말이나 도보중심에서 철도로 교통수단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1910년을 전후해 주막거리 인근에 있던 오류동역이 현재 위치의 버들이마을쪽(현 오류시장 맞은편)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생활환경의 격변이 이루어지고 결국 오류골 주막거리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아픔을 씹어야 했다.

경인철도와 오류동역개통이후 서서히 쇠락의 길로 들어가는 오류골 주막거리일대 주모들의 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는 상황이었을지는 <디지털구로문화대전> 주막거리객사편에 김정진 집필자가 내놓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보면 잘 느낄 수 있다.

“경인철도가 개통한 초창기에는 기차 손님이 없어 철도회사에서 철로변 장터에 '평양 명기 초선'식의 푯말을 꽂아놓고 기생의 풍악과 소리를 들려주며 유객을 했다,

철도개통 이후 주막 손님이 격감해 울분에 차있던 오류골 주모들이 이 풍악과 창소리를 듣고는 치마끈을 졸라매고 오류동역 정거장으로 몰려가 기생들 머리채를 낚아채고 난투극을 벌였다고 한다.

장안의 혜전 짚신 장수들의 경우도 철길 때문에 장사를 다해먹었다며 짚신을 정거장 문전에 쌓아놓고 불태우며 통곡을 하는 데모를 하기도 했다.“

오류동역은 현재의 장소인 버들이마을로 이전한 후 건물 역사 신축(1965.9), 선상역사 신축준공(1973.11), 수도권 전철 개통 및 선상역사 영업개시(1974.8), 선상역 증축(1986.12)을 진행하며 늘어나는 전철승객과 화물량을 소화해나간다.

역사의 변화는 지난 해 오류동역 일대 행복주택 준공과 함께 인공데크식의 선상공원이 건립되고 오류역북부광장이 대대적으로 리모델링되면서 120년 만에 처음으로 쉼과 휴식 공간까지 갖춘 쾌적하고 산뜻한 현대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경제산업자본 교통요충지 기반 되다

"오류동역사 앞에 작은 쉼터가 있고 그 가운데 100년 정도 된 큰 버드나무가 있었죠, 역을 건너 오류2동방향으로 가면 역사 앞쪽에 응골냇가(오류천)가 있었고. 냇가에서 친구들이랑 붕어 등 고기를 잡으며 많이 놀곤 했는데. 복개되서 지금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요."

오류동 토박이인 임한설(66) 전 오류1동주민자치위원장은 오류동역에 대해 묻자 오래전 수양버드나무 춤추던 쉼터와 냇가에 대한 기억을 먼저 떠올렸다.

70년대 오류동역은 오류동뿐 아니라 항동 수궁동 천왕동 고척동 광명시등 오류동 인근 광역생활권 주민들이 출퇴근이 나 통학을 위해 이용하는 곳이었다.

오류역사앞 작은 쉼터는 어르신들이 모여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나누고, 동네아이들이 칼싸움도 하고 개울에 가 물장구치며 고기를 잡고 놀수 있는 마을의 작은 놀이터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개통 당시부터 인천역처럼 화물을 실어나르는 '화물역'이기도 했던 오류동역은 80년대만해도 검은 석탄이나 흑연, 광물자재 등을 실은 화물차량과 철도청인부들이 늘 부산하게 움직였던 곳이기도 하다.

대형 수송화물뿐 아니라 오류동역을 따라 좌우로 포진된 수많은 공장이나 군과 연결된 전용선, 보급선 등 다양한 지선들을 통해 이동되는 화물도 적지 않았다.

실제 60, 70년대에는 오류동역 일대에 일신제강(현 동부제강) 대원제강 부산파이프(세아제강)등의 제강회사, 삼천리연탄, 한일시멘트, 온수산업단지 등이 자리잡았다. 대부분 연료나 생산품 수송 등 물류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는 메릿트가 컸기 때문.

실제 개봉1동에 있다 지금은 이전한 한일시멘트공장의 경우도 오류동역과 연결된 한일시멘트선을 사용했고, 탱크나 장갑차 자주포등 군용화물을 수송했던 제3군지역본부선, 늘푸른 수목원 옆길 항동철길로 잘 알려진 경기화학과 연결된 오류동선, 철도청 중앙보급선 등이 오류동역에서 분기된 지선이나 전용선등을 활용했다.

경인선 중간에 위치한 '화물'을 다루는 철도역이다보니 역사앞 북부광장 방향으로는 옛 철도청(한국철도공사) 산하의 각 지역에 보내는 각종 물품을 조달하고 물품에 대한 검사를 하는 중앙보급사무소(2005년 폐소)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사회나 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중의 하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역인 오류동역의 개통이 오류동생활권을 서울과 인천 강남 고속도로 등으로의 접근성 뛰어난 교통요충지로 자리잡을수 있게 했다는 점을 꼽지 않을수 없다.

이 뿐이겠는가. 철도와 오류동역의 개통은 나아가 1930년대 지역내 최초의 교육기관인 오류초등학교 전신의 등장, 19 60년대 식량산업의 획을 긋게 한 양계산업의 시작과 확산, 1990년대 중반까지도 부평과 광명 양천구등에서 시장을 보러오게 했던 50년역사의 오류시장과 유통의 발전, 오류동역앞 경인로변 수백미터사이로 20,30개의 은행 증권사 등 각종 금융점포가 즐비했던 80, 90년대 오류동 지역경제를 있게 한 1차적 '기반'이었다고 볼수 있다

인천지역 전시회 탐방열차 등 주민알림 행사 잇따라

경인선 철도 개통과 함께 '최초의 역'이란 이름을 단 철도역은 모두 7곳. 이들중 특히 인천지역의 지자체나 기관, 시민단체진영은 지역의 바른 역사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올바른 이해를 높기 위해 전시회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 눈길을 끌고 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경인철도 120주년을 기념해 10월27일(일)까지 박물관 2층에서 경인철도 120주년 기념 특별전 <다시 철도, 인천이다>를 전시하고 있다.

경인철도 10개 역 프로필부터 미국에서 가져와 고종황제와 대신에게 설명했다는 장난감 기관차모형, 오류역등 역명이 기재된 차표와 개통식 사진 등 다양한 스토리와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경인철도의 시발지가 노량진이 아니라 인천역이라며 역사적 왜곡을 바로 잡기위한 지역사회의 관심등을 요구하는 내용 등이 시선을 모으고 있다.

 

우각현역이 있던 인천 미추홀구는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주변 역사적 자산가치를 재조명하고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2019 경인선 탐방열차 참가자를 모집, 11월9일까지 두달간 매주 토요일 행사를 벌인다.

동인천역과 부평역, 부평공원등을 돌아보고 경인선 개통식 상황극과 경인선 탑승권 체험등을 한다.

서울 노량진1동 마을계획단의 역사관광분과 주민들은 지난해 철도동호회와 함께 노량진역을 알리는 포토윌을 설치하는 기념식을 가져 눈길을 끌었다.

노량진역 포토위제막식과 철도모형 전시, 기차종이모형체험등 다양한 행사를 벌였는데, 노량진역이 최초의 철도가 운행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돼 동네 주민들에게 가치있는 자원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행사를 가진 것. 지역 고유의 역사와 자원이 공동체의식과 지역발전의 '힘'이 되고 가치를 높여주는 시대. 

수백억을 주고도 살수 없는 120년 역사  '최초의 철도역'이 구로지역에 있어도 있는지 조차 모르고 흘러가는 현재의 지역 정책 등에 대한 다각적인 점검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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